프로방스 한인교회

2018.03.09 17:37

창세기 Prolog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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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본 문 창 1.1 ; 요 1.1 ; 히 1.1
설 교 일 2017-02-26
설교자 박성형 목사

오늘 설교는 창세기를 본격적으로 보기에 앞서 Prologue 즉 머리말 형식이 될 것입니다. 음악이나 연극으로 치면 서곡, 서막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죠. 다른 의미로는 창세기를 비롯해 성경 전체를 꿰뚫는 흐름을 짚어보는 시간이 되기도 할 겁니다. 말씀이 다가오고, 말씀을 깨닫는 은혜가 여러분 모두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의 창세기 보도를 보면, 세계의 시작이 언제인지는 물론이거니와 인간의 시작, 더 나아가 그 인간이 언제부터 말을 시작했는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연대조차 가늠할 수 없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다만 창세기는 인간이 쓰는 언어란 것이 인간이 진화하다 보니까 그저 우연히 나왔다거나 발달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만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이는 과학의 영역이 아닌 믿음의 영역에 속합니다.

특히 에덴동산 이야기를 보면, 하나님은 말씀을 하셨고 아담은 그 말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아담은 말로써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고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이름을 그대로 인정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동반자를 주셨을 때도 말이 있었습니다.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창 2.23).”라는 감탄사였습니다. 이어서 아담 שׁיא이 그 동반자를 보고 “여자 השׁיא”라고 보통명사도 지어주었습니다. 창세기는 긍정 언어이든, 부정 언어이든 말을 중심으로 계속해서 사건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인간 아담이 하나님의 ‘말’을 곧이곧대로 안 듣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가 엇나가고 신뢰가 틀어지기 시작합니다. 그게 바로 선악과를 따 먹은 사건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십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창 3.9).”라고 말의 끈을 놓지 않으십니다. 잘못을 저질렀기에 하나님의 음성을 전혀 못 알아들을 줄 알았는데, 다행히도 알아듣습니다. 이 아담과 하와가 비록 숨어서이기는 하지만 대답을 합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리고 어쩌다가 금지된 열매를 먹게 되었는지 말로써 자초지종 설명을 합니다. 설명이라기보다는 변명과 책임 전가였습니다. 그렇게 인간의 말을 듣고서 하나님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그 처방은 바로,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나가야 하고 그에게 생명나무가 금지되었으며(창 3.23-24), 앞으로는 피땀 흘리는 노동과 해산하는 수고와 고통이 있으리라는 겁니다(창 3.16-17).

 

이렇듯 율법 없는 세계에서부터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나 있었습니다. 인간이 비록 불순종했어도 아담을 찾던 하나님의 말씀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뒤로 노아에게도 찾아왔고(창 6장), 아브라함과 그 손자 야곱에게도 찾아왔습니다(창 12장, 28장, etc.). 이렇게 태초라는 1막을 지나 족장시대라는 2막까지 마칩니다. 여기까지가 창세기입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은 3막에 해당하는 출애굽기에 다시 또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 이후 수백 년이 지나 이집트 포로 당시의 모세에게 나타나신 겁니다.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를 지날 때도 그에게 이르셨다고 합니다. 그 중 출애굽기 31장 18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시내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라고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뜻입니다. 모세 이후 넓게 구약 전체를 봐도 하나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신약의 히브리서를 보면, “옛적에 선지자들을 통하여 … 말씀하신 하나님이(히 1.1)”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이스라엘과는 언약으로 일하셨으며, 본인의 약속을 끝까지 잊지 않으셨습니다. 이 언약도 일차적으로는 말로 이뤄지는 것 아닙니까?

어찌되었든 결론적으로 말해, 말씀은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창세기와 요한복음에 따르면 말씀은 세상을 창조하는 존재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은 인간과 소통하고 교제하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구약에서 말씀이라는 단어는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이자, 하나님의 행동과 행위를 드러내는 통일체적 성격을 띤 단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또는 이집트 탈출이라는 엄청난 기적과 행위를 통해서 자신의 광대함을 드러내 보이시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최소한 인간과의 관계에서 말입니다.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이유가 무엇이었나요? 광야를 지나던 중, 말로써 반석에서 물을 내게 하라 했는데, 화를 참지 못하고 혈기를 부리느라 지팡이로 반석을 때린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지팡이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결국은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갔습니다. 단 한 가지 잘못이었지만,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본질과 그에 대한 증거는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겁니다.

물론 모세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를 이렇게 단편적으로 보고 끝낼 일은 아닙니다. 잠깐 (아주 짧게) 곁가지로 나가자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간 것, 그건 첫째로 모세를 우상화될 위험에서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둘째 ‘인간 모세를 영웅시하고 우상화시킬 위험에서 이스라엘을 보호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라고 생각해 봅니다. 모세를 향한 징계에 담긴 모세와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이중적인 배려였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다시 “말씀”이라는 주제로 돌아오겠습니다. 로마서 말씀에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롬 10.17)”라고 나오듯이,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무엇을 듣습니까?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귀가 있어도 그 말씀을 듣지 못합니다. 아니 일부러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닫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귓구멍을 막는다 해도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어쩔 수 없이 들립니다. 로마서 1장과 2장에는 이렇게 나옵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 것이니라. …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며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1.20, 2.14-15).”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에게만 부여된 특수하고 특정한 율법을 몰라도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핑계 댈 수 없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무리 무시하고 눈귀를 막아도 별 수 없이 인간 마음에 양심이 새겨있어서 변명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런 사실을 인정하지도 용납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은 본래 잘 듣지 않는 것 같습니다. 더욱 슬픈 것은 율법이라는 명확한 음성을 건네받은 ‘선민’ 이스라엘조차 하나님의 말을 듣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결국 구약의 마지막 책 말라기서 이후 신약 시대가 오기까지 400여 년간 하나님은 더 이상 아무 말씀을 안 하십니다. 물론 학자들 간에 이견이 있긴 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 전통이 끊어진 것은 아니라는 견해죠. 예언자 학교도 있었고, 가톨릭에서는 외경으로 치는 마카비아서 같은 경우도 있었으니 그들 입장에서는 침묵하신 게 아니라고 볼만도 합니다. 그렇더라도 하나님께서 긴 시간 동안 침묵하셨다는 데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있습니다.

 

그런 오랜 세월 후에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나타납니다. 언제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늘 있어 왔던 선지자 한 명이 태어난 걸까요? 신약으로 넘어와 볼까요? 이분도 선지자인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기존 선지자와 차원을 달리하는 분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죠? 오늘 읽은 두 번째 본문 뒤로 쭉 설명이 나옵니다. 즉 요한복음에 따르면 하나님의 말, 태초에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 이 땅에 내려왔는데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브리서에 따르면 마지막에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다고 나옵니다. 앞서 언급한 로마서 10장으로 다시 가서 말씀드리자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그렇습니다. 들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나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계셨던 말씀이라는 존재이자 말씀하시는 존재자입니다. 그 말씀이 우리 곁에 내려왔기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겁니다.

창세기에 나온 불 칼, 즉 생명낙원에 이르는 길을 지키는 천사들의 불 칼은 우리 인간의 한계를 말해줍니다. 그 불 칼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제거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아담의 범죄 이후로 인간은 생명으로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을 상실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드디어 불 칼을 제거해서 생명나무에 접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말씀을 다시 들려주셔서 생명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이자 생명이 인간 세상에 직접 내려오신 겁니다. 이런 말씀을 진리로 믿고 따르는 자에게 생명의 길을 여셨습니다. 인간은 이렇게 하나님의 적극적인 사랑으로 비로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게 됐습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태초에 존재하던 에덴동산의 생명나무가 아닌 그보다 더 귀한 예수님이라는 생명나무를 얻게 되었습니다. 바울의 대속론에 따르면 우리가 얻은 생명과 하나님 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인간이 자기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를 믿고 따르기만 하면 모든 죄를 사해준다는 약속의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주신 겁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끝까지 말의 끈을 놓지 않으신 결과물을 우리가 얼떨결에 받아들게 된 겁니다.

 

자, 여기까지가 하나님의 말씀에서부터 예수님까지 내려오는 기독교적 역사이자 설명이자 신학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말과 이런 설명조차도 현대인에게는 어렵게 다가온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적극적으로 개입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내려오셨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아니 점점 더 세미한 음성이 되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보았을 때에도 그저 작은 가시나무 떨기에 타는 불꽃으로 보였는데, 인간의 욕망이 차고 넘치는 현대에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사실상 더 어려울 테지요. 모세가 들었던 하나님의 말소리는 이제 세미할 대로 세미해져 더 이상 들려오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음성을 들을까요? 하나님 말씀은 어디에 있는 걸까요? 어떻게 그 말씀을 찾아야 하나요? 그걸 과연 들을 수는 있는 걸까요? 우리는 믿으면 된다고 너무 쉽게 정답을 얘기하지만 그게 과연 쉬운 일이던가요? 그게 쉬운 일이었다면 이 땅의 믿지 않는 수많은 사람들은 무엇인가요?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2차적인 방법을 마련해주셨습니다. 다니엘 데넷이라는 사람이 쓴 책, 우리말로는 <마음의 진화>로 번역된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체 중에서 인간에게서만 생각하는 마음이 발생했는데, 이 사유는 언어를 통해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언어적 사유는 인간의 기억 방식이 다른 동물처럼 안에 정보를 저장하는 방식이 아니라 외부 환경에 저장하는 방식에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물론 동물도 기억을 외부 환경에 심어 놓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개가 오줌을 싼다든지, 곰이 앞발로 나무를 긁어 상처를 내놓는다든지 하는 것이 바로 영역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하지만 동물은 거기까지죠. 이와는 다르게 인간이 외부 환경에 기억하는 방식은 바로 글자입니다. 시내 산의 모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에만 그치지 않으시고 돌에 새긴 십계명(적힌 말씀)을 주신 것처럼 말입니다. 그와 같이 글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게 남겨놓은 것이 바로 성경입니다. 언어를 통해 생각하는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2차적 방법은 기록된 성경입니다.

너무 싱거운 대답을 한 것 같아서 죄송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알려면 성경을 많이, 그리고 잘 읽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구약적인 방법, 직접적이고 원초적인 방법은 결코 쉽지 않은 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때로 너무 특별한 방식, 자기만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건 위험한 방식입니다. ‘내가 들었다.’ 하는 신의 음성, 그게 진짜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진위를 구분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건 사실 과학적으로 인간 두뇌 발전을 보더라도 고대 세계에서나 통용되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의식의 기원>이라는 책에서 저자 줄리언 제인스는 고대 인간에게는 양원정신이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지금과는 전혀 다른 체계의 우뇌, 좌뇌로 나뉘어 있어서 그 두개가 각각 말의 기능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한쪽에서 얘기한 소리를 신의 음성, 신의 소리로 이해했다고 하는 거죠. 그러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점차 그런 뇌 체계가 사라졌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처럼, 모세처럼, 다윗처럼, 여러 선지자처럼 말씀을 듣고 싶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점점 그런 방식을 사용하지 않으십니다. 신약만 보더라도 그 빈도수가 현저히 낮아진 것을 볼 수 있지 않나요? 따라서 현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방법은 2차적 방법, 바로 성경 말씀에 들어있습니다. 답이 너무 싱겁습니까? 싱겁더라도 지금 우리 손에 들린 성경 말씀을 소중히 여기시고 밥처럼 자주 먹기 바랍니다.

성경의 인물들이 얼마나 하나님 말씀을 사모했는지,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려 드리겠습니다. “나 곧 내 영혼이 여호와를 기다리며 내가 그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5, 6).”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 123, 131).”

왜 이들은 이토록 말씀을 사모했을까요? 히브리서에 쓰여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히 4.12)”하기 때문에 사모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글로 읽을지라도 단순히 죽은 활자가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또 그런 말씀 앞에서 자신의 본 모습을 숨길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삶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말씀을 사모했습니다.

또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나와 있듯이,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5-17).” 말씀은 지혜를 가져다주고, 사람으로서 온전하게 하고 유익을 주고 선한 일을 하게끔 만들기 때문에 사모했습니다.

이렇듯 성경 말씀은 ‘나’라는 존재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힘은 그냥 나타나지도 않고 아무에게나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진리로 믿고 따를 때 즉 신앙인이 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힘입니다. 성경을 읽고 이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자각할 때에만 가능합니다. 예전에는 양심처럼 희미하게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의 율법처럼 국지적으로 나타났고 기록되었던 하나님의 사랑의 음성이 이제는 우리 앞에 기록된 말로 놓여 있습니다. 더 나아가 신약에는 그 말씀과 사랑이 예수라는 이름으로,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로도 바꿔 쓰여 있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그 말씀 앞에서 결단하실 차례입니다. 결단할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 따라 사셔야 합니다.

요한일서 1장 1절에서 4절까지 같이 읽으며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주님 안에 갇힌 자

박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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