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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교 본 문 창 18.1-8,16-33 ; 19.1-11
설 교 일 2018-03-04
설교자 박성형 목사

본문, 그 중에서도 소돔과 고모라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전에, 그 이전의 창세기 역사를 잠깐 훑어보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에는 가인의 계보와 셋의 계보가 나옵니다. 창세기 5장에 나온 계보를 곧이곧대로 계산해보자면, 셋의 계보에서는 거의 900년 동안 죽은 이가 나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다는 뜻이 되겠죠. 이 말인즉슨 “네가 정녕 죽으리라.”라는 하나님의 말씀이 육체적인 측면에서만 보자면 바로 이뤄진 것이 아니고, 현실적으로는 900년 이상 살도록 놔두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고려시대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서 우리와 같이 있는 셈이죠. 굉장한 기간 아닙니까? 하나님은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살게 해주시다가 어느 정도 때가 돼서 그 뒤로 하나둘씩 자연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두셨을까요? 여러 대답이 있겠지만 이 질문을 품고 계속 가봅시다.

물론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이후에 죽음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닙니다. 죽음이 무엇인지 알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죽음은 ‘셋’이라는 사람의 반대편 가문, 가인이자 가인의 후손들한테 나타납니다. 창세기 4장 말씀에 나옵니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자면 이들에게는 죽음이 있던 것이 아니라 죽임, 즉 살인이 있었을 뿐입니다. 셋의 가문에서 볼 수 있었던 언젠가 다가올 죽음 즉,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이 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죽음을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이들이었고, 자기들 뜻대로 인간 역사에 죽음을 당겨 온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자연적인 죽음의 역사가 아니라 한마디로 ‘죽임의 역사’였습니다. 인간 죽음의 역사는 사실상 자연사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살인사로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영적인 죽음을 가져온 아담이든 육체적 죽음을 만든 가인이든, 죽음을 인간 역사에 직접 끌어오고 당겨온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스스로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 그 중에서도 대홍수와 소돔과 고모라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고 어떻게 마음이 변하고 하나님이 어떻게 후회할 수가 있느냐는 둥, 자기가 창조한 인간을 처치하는 잔혹한 하나님이라는 둥, 수많은 반응을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편파성과 폭력성, 그리고 성경의 모순을 찾을까 눈을 부릅뜨지만, 정작 앞에서 말씀드린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성과 그에 따른 죽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성경은 확실히 하나님을 찾게 해주고 알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이 신기한 것은 하나님을 찾으면서 동시에 인간을 알게 만드는 복합적이고 신비한 책이라는 겁니다. 올바른 성경 읽기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와 더불어 인간의 모습이 어떠한지도 같이 살피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까 하나님은 왜 셋 가문에서 900년 이상을 그냥 살도록 허락하셨는지를 잠시 마음에 두라고 했었죠? 인간에게 그 기간은 기회였던 거죠. 창세기 3장부터의 흐름을 따라서 6장의 대홍수까지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뜬금없이 어떤 일을 결정하신 게 아니라 차곡차곡 쌓여만 가는 악의 역사를 지켜보셨습니다. 그래서 사실은 심판조차도 갑작스런 변덕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극명한 예로서, 조금 전에 언급 드린 창세기 6장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입니다. 방주를 건조하는 노아만 생각해 봐도 학자들은 그 건조 기간이 최소 40년에서 최대 100년까지 걸렸을 거라 봅니다. 이 기간은 쉽게 말해, 한 인간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하나님은 기다리셨다고 보면 되는 기간입니다. 이렇듯 대홍수조차도 하나님은 방주를 건조하는 모습, 즉 징조를 보이면서 한 인간의 평생을 기다리신 겁니다. 하나님은 기다리고 기다리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다리고 기다렸어도 인간은 결코 달라지지 않았다는 소리일 겁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와야죠. 인간의 모습이 어떠했기에 그렇게 근심하고 한탄하셨을까요? 6장에 나오는 표현처럼 죄악이 관영하고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하나님은 과연 어떤 죄악을 말하고 계신 걸까요? 창세기 4장을 보면 알아낼 수 있을까요? 거기에 나온 살인자 가인과 라멕의 모습으로 보건대 인간의 폭력성과 잔인성과 잔혹성이라고 뭉뚱그려 말할 수는 있습니다. 게다가 인간은 거기서 한 발 더 나가 창세기 6장 5절 표현처럼, 그 잔인함이 단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계획을 세워서 행하는 악으로 발전한 것이리라 생각해 볼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 말고는 구체적으로 어떤 악함 때문에 대홍수를 결정하셨는지 더 이상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이와 비슷한 심판, 비슷한 사례에서 그 심판의 이유를 찾아보는 방법을 따라야 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셨다는 의미에서 비슷한 사례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에 등장한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18장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도시가 아닙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창세기 13장에 처음으로 언급됐습니다. 어떤 장면에서 나왔습니까? 아브람과 롯이 갈라설 때 롯이 택한 곳이 바로 이 근방이었습니다. 거기서 성경은 증언하길,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창 13.10)”, 조금 더 가서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창 13.13).”라고 합니다.

그러면, 창세기 13장에 처음 언급된 후 18장에 다시 나오기까지 기간은 어느 정도일까요? 한 번 따져보세요. 아브람이 하란을 떠난 때가 75세였다 하고, 18장에 나오는 아브라함은 99세라고 하니까 길게 보면 24년 정도입니다. 창세기 12장과 13장 사이에는 몇 년의 차이가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 기간을 뺀다 하더라도 족히 20년은 될 것 같습니다. 노아시대의 방주 건조 기간처럼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역시 하나님의 즉흥적인 행동이 아님을 볼 수 있지 않나요? 그 기간 사이에 하나님은 소돔과 고모라를 계속 보고 계셨고 계속 기다리셨다는 뜻입니다. 그럼에도 소돔과 고모라는 그 악함에 전혀 변화가 없었다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아니 오히려 악이 가중해졌기에 하나님의 천사들이 직접 내려와 이제는 마지막 버튼을 누를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자,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죠.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신 창세기 6장의 ‘홍수 심판’과 닮은꼴인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그 열쇠를 우리는 에스겔서 16장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의 유다서에서도 소돔과 고모라가 언급되고 있기는 합니다만, 유다서에서의 언급은 유다라는 성경저자의 표현으로서 일차적 해석이 가미된 것이라면,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전달한 형식이기 때문에 조금 더 큰 의미를 두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에스겔서 16장 49절과 50절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의 딸들에게 교만함과 음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겔 16.49-50).”

잘 들으셨는지요? 앞의 질문을 다시 해보도록 하죠. 인간의 타락성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기에 하나님은 싫어하셨을까요? 하나님은 생명을 낳으신 분인데, 자신이 창조한 사람을 쓸어버려야겠다는 마음이 들 정도라면, 악과 죽음이 그만큼 거대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다시 묻습니다. 어떤 죄악을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실까요? 그 답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본인들은 “교만하고 풍족하고 태평하고 … 거만하고 가증한 일”에 속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거만하고 가증한 일 속에 신약의 유다서를 같이 집어넣어 얘기할 수도 있을 겁니다. 즉, “소돔과 고모라는 … 거만하고 가증하여 …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를 덧붙일 수 있겠죠. 어찌 되었든 중요 부분은 앞부분입니다. ‘풍족하고 태평함에도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돕지’ 않은 죄입니다. 그것이 또한 거만하고 가증한 일이기도 합니다.

가난하고 궁핍하고 약한 자들은 모두 선한 자들이어서 하나님은 그들을 불쌍히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한 흑백논리를 전하려고 기록된 것이 아닙니다. 가난한 이들도 악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기회만 되고, 조그만 감투만 쓰게 되면 똑같은 짓을 할 만한 인간인 것은 같습니다. 현대적 예로 쉽게 말하자면, 대기업의 ‘갑’질에 ‘을’이라고 피해자처럼 행세하는 중소기업, 영세기업 사장들이 자기보다 낮은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심한 ‘갑’질을 하고, 대우와 처우를 열악하게 한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을’은 ‘병’에게, ‘병’은 또 ‘정’에게, ‘정’은 또 어느 누군가에게 ‘갑’질을 하는 거죠. 가난한 자 혹은 사회적 약자가 곧 선은 아닙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가난한 자들은 모두 경건하고 선하다는 그런 순진한 생각으로 하나님이 좋게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나이브한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기준인 상대적 가난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보고 계신 겁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관심을 두시는 이유는, 그들은 죽는 자리로 내몰리기 쉬운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삶에서 늘 절벽을 맞이하고 있으며, 죽음이 늘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붙들어야 할 끈이란 게 존재하지 않아서 절대자에게 탄식할 수밖에 없는 이들입니다. 그런데 쉼 쉬는 것조차 할 수 없게 끊어버리는 인간의 잔인함과 강퍅함을 하나님은 싫어하시는 겁니다. 창세기 4장에서는 단순히 가인과 아벨이라는 개인 간의 질투와 악함과 폭력으로 나타났지만, 시간이 흘러 창세기 6장에서는 드디어 악이 개인의 역사에 그치지 않고 드디어 온 인류에게 퍼진 모습으로 나오는 겁니다. 더 슬픈 것은 그 본성이 대홍수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집단적으로 퍼진 악의 또 다른 예로 성경은 소돔과 고모라를 등장시키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집단으로 번진 악의 역사는 비단 창세기 역사에만 있던 것이 아닙니다. 악한 역사는 어떤 특정한 시기에 어떤 특정한 소수에게만 일어나는 특별한 현상이 아닙니다. 이런 악함은 한 개인만이 아니라 21세기에도 노아 시대처럼, 소돔과 고모라 도시처럼 공동체 전체로 번질 수 있음을 우리는 솔직하게 인정해야 합니다. 지금 고국에서 들려오는 소식만 봐도 잘 알 수 있잖습니까? 계속해서 드러나고 있는 정경유착과 법경유착, 경언유착 등 부정과 부패와 비리만 보더라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묵과하고 동조하고 가담했으며, 그 범위가 얼마나 넓고 깊게 뻗어있는지를 볼 수 있잖습니까? 얘기하고 보니 모두 경제, 기업, ‘돈’과 관련돼 있군요. 그만큼 돈이 왕이 된 사회라는 뜻이겠죠. 자기만 살고 자기만 배불리려고 남들은 의도적으로 밥줄을 끊어 일부러 사회적 약자를 늘리는 이들뿐만이 아니라, ‘권력은 그런 거지, 때 안 묻은 사람이 어디 있어.’ 하면서 그걸 용인하는 사회 구성원들에 대해서도 하나님은 대노하십니다. 약자로 영원히 자리매김 시켜야만 자기들한테 기어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해서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태도들, ‘같이 살자’가 아니라, ‘나만 살고 너는 죽어도 돼’라는 자세를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여기 소돔과 고모라에서 더 섬뜩한 모습은 단지 일부 혹은 특정한 카르텔 속에 있는 자들의 타락이 아니라는 데에 있습니다. 거기는 정상적인 사람을 정상으로 놔두지 않는 사회였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 성 사람 곧 소돔 백성들이 노소를 막론하고 원근에서 다 모여 그 집을 에워싸고, 롯을 부르고 그에게 이르되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19.4-5).” 이방인이 도시에 들어옴과 동시에 놀랍게도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가깝고 멀고 상관없이 모두 나와서 행패를 부리고 있다는 점을 보십시오. “너만 깨끗하게 있지 말고, 같이 더러워지자.”라는 태도입니다. 부패에 너도 한 발 담그게 만들어서 입막음하는 흔한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른 사람까지 끌어들여서 공동책임으로 못 빠져나가게 해 놓는 겁니다. 너도 얽혀 있으니까 섣부른 짓 하지 말라는 경고도 되는 셈이죠. 이와 같이 기어이 똥을 묻혀서 다 같이 냄새나니까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고 세뇌시키는 수준을, 사람들의 그런 사고와 자세를 하나님은 가장 싫어하십니다. 비정상적인 것을 정상이라고 보게 하는 오염된 사고와 뒤틀리고 기울어진 사회를 소돔과 고모라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소돔과 고모라 얘기만이 아니라 본문으로 아브라함까지 곁들여 읽은 이유가 있을까요? 제가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가 어디 있느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과는 다른 모습을 아브라함이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모습은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과는 반대의 모습인 것입니다. 18장에 걸쳐 나오는 아브라함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자, 우리 식으로 말해 예수님께 돌아오는 자들이 보여야 할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모습이냐? 세 가지로 쉽고 짧게 말하자면, 18장 전반부에 나온 아브라함의 모습은 하나님을 향한 구원 요청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회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첫째를 지난주에 봤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처럼 낯선 이들, 자기들과 다른 이들을 박대하는 모습이 아니라 나그네들을 대접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셋째로 18장 후반부에서 아브라함은 다른 이들을 위한 호소와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게 소돔과 고모라를 위한 기도였는지, 조카 롯이 생각나서 한 기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혹시라도 있을 의인들을 위한 기도와 호소가 나왔다는 것이죠. 따라서 창세기 18장과 19장 말씀은 무얼 말하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에게 나타나야 하는 삶의 반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복해 말씀드리건대, 크게 나누어 세 가지입니다. 회개 repentance, 다른 말로 구원 요청입니다. 그리고 선한 대접 hospitalite과 남을 위한 기도 priere d’intercession(중보기도)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우리가 나눈 얘기는 하나님의 얼굴, 즉 예수님을 믿음으로 만나는 자들에게 있어야 할 반응입니다. 그 중에 두 번째인 선대 혹은 맞이함은 이 시대에 우리가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이자 동시에 예수님을 대접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그걸 18장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로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얼굴을 본 자의 반응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다른 말로 예수님을 보는 자는 맞이함과 선한 대접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나름대로 어떤 신적인 존재를 봤기 때문에 그런 선한 대접을 했다고 핑계대고 싶은 마음도 살짝 듭니다. 지금 나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보기는커녕 예수님도 직접 못 보지 않느냐 항변하고 싶기도 합니다. 우리는 정녕 예수님을 못 보는 것일까요? 그리고 예수님을 맞이해 대접할 수 방법도 없는 걸까요? 예수님을 보는 것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것이라는 말 외에는, 이른바 ‘믿음’ 외에는 예수님을 보는 또 다른 방법은 없는 걸까요?

아마도 있을 겁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고 계시는 마태복음 25장에 그 해답이 들어 있습니다. 25장 31-46절을 찾아서 다 같이 읽어봅시다. 러시아의 톨스토이에게도 많은 영향을 미친 구절이기도 합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 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을 맞이함과 예수님을 보는 일은 마태복음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가 알게 모르게 하는 일 속에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는 일은 어떤 특별한 여정에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맞이하는 방법은 어떤 신비한 종교행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일상 속에 들어 있습니다. 단지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삶 속에서 소돔과 고모라에 가깝게 되느냐, 아브라함에 가깝게 되느냐가 정해지겠죠. 그러므로 예수님은 여러분의 생활 속에 계시기도 하고, 안 계시기도 합니다. 그건 여러분이 어디에 있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들을 만나고, 어떤 이들을 맞이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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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안에 갇힌 자 박성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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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설 교 본 문 제목 설교자 설 교 일 조회 수
» 창 18.1-8,16-33 ; 19.1-11 하나님의 얼굴, 예수님의 얼굴 박성형 목사 2018-03-04 142
3 창 1.1 ; 요 1.1 ; 히 1.1 창세기 Prologue 박성형 목사 2017-02-26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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