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9년, 도피네 지방의 갸쁘 출생인 태어난 기욤 파렐은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자랐다. 기욤이 여섯 살 혹은 일곱 살 되었을 때, 그는 성지순례를 위해 어느 산 하나에 올랐다. 그곳은 십자가를 숭배하는 곳이었는데, « 이곳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십자가 나무로 만들었고, 십자가의 동판은 주님께서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씼기셨던 대야 »라고 전해지던 곳이었다.
기욤은 공부에 재능을 보여서 부모가 일찍이 그를 빠리로 올려보냈다. 그는 빠리에 올라가기 전부터 라틴어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 진정으로 경건한 삶으로 자신을 다 바치겠다고 다짐했던 그는 르페브르 데따쁠 교수와 가깝게 지냈다. 르페브르 교수는 깊은 존경심으로 미사를 찬양하던 사람들 중에 하나였다. 성상과 성화에 존숭을 올리면서 아주 오랫동안 무릎을 꿇던 그였다. 이렇게 그가 경건의 시간을 가질 때 파렐은 자주 그의 곁에 머물렀다. 파렐은 이런 인물의 곁에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 참으로 기쁨을 누렸다. 르페브르 교수는 제자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 이 세상은 새롭게 바뀌어야 하네. 세상이 이토록 악 가운데 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세. »
파렐은 성경을 이미 예전부터 펴 읽고 있었으나, 그가 찾던 새로운 경건을 찾지는 못하고 있었다. 파렐보다 성경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하고 있던 르페브르는 그에게 성경을 가르치기를, «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자격도 없다. 모든 것은 오직 그분의 은혜, 오직 하나님의 자비로 말미암아 온다. »고 했다. 파렐은 말하기를, « 그동안 내 나름대로 고심해왔던 부분들이 있었기에 그의 말은 내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다. »
르페브르는 가톨릭 미사 예전예식에 반하는 책을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빠리 신학자들의 감시를 받고 있었다. 스승의 생각과 학문을 잘 알고 있던 파렐은 그때부터 학자들에 맞서 도전하기 시작했다.
1516년, 파렐은 스위스 바젤에서 프랑스 빠리까지 온 보부상 덕분에 « 에라스무스의 헬라어 신약성경 »을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3년 간, 파렐은 무릎을 꿇고 그리스어 성경을 라틴어와 비교해서 성경을 읽으며, « 크든 작든 그 어떤 것도 그 누구도 업신 여김 없이, 그저 성경의 가르침을 받고 싶은 마음으로 » 하나님께 올바른 길을 보여달라고 기도했다.
드디어 그는 하나님께서 그분만을 경배하기를 원하시고, 이 세상 것이나 이 세상 것이 아닌 것들에 기도하는 모두가 진정한 우상숭배라는 것 »을 깨달았다.
나중에 늦게나마 르페브르는 첫 번째 개혁의 움직임에 따라나섰다. 그리고 신부가 아니었던 파렐에게 설교를 하라고 독촉했다. 파렐은 그에게 말했다. « 여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세상의 쇄신에 관해 제게 말씀하셨던 일들이 태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 기욤 파렐이 남긴 글 중